핵심 요약
2018년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낯선 초상화 한 점이 출품됐다.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의 얼굴은 윤곽이 흐릿했고,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작가의 이름 대신 복잡한 수학 공식이 서명처럼 적혀 있었다. 프랑스의 예술가 집단 오비어스(Obvious)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제작한 《에드몽 드 벨라미》(Edmond de Belamy)였다.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내놓으며 스스로를 ‘알고리즘이 만든 작품을 경매에 올린 첫 경매회사’라고 소개했고, 작품은 출품 단계부터 관심을 모았다. 경매 전 추정가는 7000~1만달러였지만, 실제 낙찰가는 43만2500달러에 달했다. 당시 환율로 약 5억원이다. 수수료를 포함한 이 낙찰가는 최고 추정가의 43배였고, 수수료를 뺀 해머가(망치 가격) 35만달러만 따져도 35배였다.
작품의 완성도와 제작 기술만으로는 이 가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주요 경매시장에 처음 진입한 AI 작품이라는 상징성과 이를 둘러싼 시장의 관심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43만달러 낙찰의 실체… 캔버스가 아닌 ‘상징적 이력’을 샀다
미술품에는 일반 상품처럼 생산원가에 일정한 이윤을 더해 가격을 정하는 공식이 없다. 크기와 재료가 비슷한 작품이라도 작가의 명성과 전시 이력, 작품의 희소성, 갤러리와 미술관의 평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어떤 기관과 소장자를 거쳤는지도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옌스 베케르트(Jens Beckert)와 요르크 뢰셀(Jörg Rössel)은 현대미술의 가격이 작품의 객관적인 품질만으로 결정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가치를 정확히 측정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작가와 작품에 관해 축적된 평판이 가격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평가 기준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던 초기 AI 미술시장에서는 작품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선택하고 소개한 주체가 중요했다.
《에드몽 드 벨라미》의 낙찰가에도 이러한 시장의 특성이 반영됐다. 세계적인 경매회사가 AI 작품을 정식 출품작으로 받아들였고, 주요 경매시장에서 처음 거래된 AI 작품이라는 상징성도 확보했다. 여기에 새로운 기술을 향한 언론과 수집가의 관심이 더해지면서 예상보다 높은 가격이 형성됐다.
디지털 이미지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크리스티가 판매한 첫 AI 작품’이라는 이력은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희소성은 이미지가 한 점만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미술시장에 처음 진입한 사례라는 데 있었다. 구매자는 캔버스에 출력된 초상화뿐 아니라 그 이력에도 값을 지불한 셈이다.
“미술품의 가격은 객관적인 품질이 아니라 축적된 평판에서 나온다. 디지털 이미지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주요 경매시장에 처음 진입했다’는 대체 불가능한 이력에 시장은 값을 지불했다.”
오픈소스 코드 논란이 던진 질문… “누가 창작했는가”
작품의 제작 방식과 이를 전면에 드러낸 구성도 화제성을 높였다. 오비어스에 따르면 이들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제작된 초상화 1만5000점을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에 학습시킨 뒤, 만들어진 여러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최종 작품으로 선택했다. 이미지는 캔버스에 출력됐고, 서명 자리에는 작가의 이름 대신 알고리즘의 수학 공식이 들어갔다. AI를 활용한 제작 과정이 작품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화제성을 높인 바로 그 제작 방식은 경매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오비어스가 사용한 코드가 당시 19세였던 로비 배럿(Robbie Barrat)이 온라인에 공개한 오픈소스 코드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비어스는 생성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작품의 개념과 발표 방식을 설계했지만, 알고리즘 구현의 토대가 된 코드에는 배럿의 작업이 활용됐다. 이에 따라 관심은 ‘AI가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실제 창작에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가’라는 문제로 옮겨갔다.
AI를 활용한 창작에서는 코드를 개발한 사람과 이미지를 생성한 사람, 최종 결과를 작품으로 발표한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사용한 기술과 데이터, 인간의 개입 범위, 제작 참여자의 역할도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새로운 정보가 된다.
《에드몽 드 벨라미》의 낙찰가는 AI가 생성한 이미지에만 매겨진 가격으로 보기 어렵다. 오비어스가 구성한 작품의 이야기와 주요 경매시장에서의 첫 거래라는 이력, 이를 세계시장에 소개한 크리스티의 영향력이 함께 반영된 결과였다. 다만 이러한 관심이 한 작품의 화제에 그쳤는지, 실제 AI 미술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졌는지는 이후의 거래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7년 만의 전용 경매가 남긴 과제… 화제를 넘어 ‘반복 거래’의 시험대로
7년이 지난 2025년, 크리스티는 ‘증강 지능’(Augmented Intelligence)이라는 AI 미술 전용 경매를 열었다. 주요 경매회사가 AI 작품만을 모아 진행한 최초의 경매로, 초기 컴퓨터 예술가부터 생성형 AI와 로봇 기술을 활용하는 동시대 작가까지 여러 세대가 참여했다. 출품 작가에는 사람이 짜 넣은 규칙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초기 인공지능 미술 프로그램 아론(AARON)을 개발한 해럴드 코헨(Harold Cohen)도 포함됐다.
경매에는 30점이 넘는 작품이 출품됐으며, 총판매액은 72만8784달러로 당시 환율로 약 10억원 규모였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등록자의 37%는 크리스티를 처음 이용한 고객이었고, 입찰자의 48%는 밀레니얼과 Z세대였다. 2018년 한 점의 AI 초상화가 이례적인 출품작으로 소개된 데서 나아가, 7년 만에 여러 세대의 AI 작가와 작품을 하나의 전용 경매로 구성한 것이다.
전용 경매의 등장은 AI 작품이 하나의 판매 분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전체 판매액은 2018년 《에드몽 드 벨라미》 한 점의 낙찰가와 비교해 두 배에 미치지 못했다. 출품 작품의 수와 구성, 경매 방식이 달라 금액만으로 두 결과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최초의 AI 작품’에 집중된 관심과 지속적인 AI 미술시장의 형성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시장이 이어지려면 여러 작가의 작품이 반복해서 거래되고 작품별 가격 기록이 축적돼야 하며, 이를 꾸준히 구매할 수집가층도 형성돼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2025년 전용 경매의 의미는 총판매액보다 경매의 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크리스티는 초기 컴퓨터 예술가와 최근의 생성형 AI 작가를 함께 소개하며 AI 미술을 수십 년간 이어진 컴퓨터 예술의 흐름 안에 배치했다. 최근 제작된 AI 이미지와 오랜 기간 작업을 이어온 작가의 작품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경매회사는 이미 형성된 가격을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출품할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고 그 중요성을 설명하며, 수집가가 낯선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의 평판을 형성하고 이후 작품의 가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직 시장의 기준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AI 미술에서는 그 영향력이 더욱 크게 나타날 수 있다.
AI 작품이라고 해서 가격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활동과 전시 이력, 작품의 희소성, 수집가의 수요는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AI 작품에서는 사용한 데이터와 기술, 인간의 개입 범위, 제작 참여자의 역할이 새로운 판단 요소로 더해진다.
“이제 AI 미술시장의 과제는 작품이 팔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어떤 작품의 가치가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유지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축적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2018년 《에드몽 드 벨라미》의 낙찰이 AI 작품의 시장 진입을 알린 사건이었다면, 2025년 전용 경매는 여러 세대의 작가와 작품을 하나의 판매 분야로 묶으려는 시도였다. 전용 경매가 열렸다는 사실은 시장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 결과만으로 안정적인 가격 체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 AI 미술시장의 과제는 작품이 팔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AI 미술시장은 어떤 작품의 가치가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유지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축적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미술시장과 예술금융, 문화예술산업이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예술시장의 접점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