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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백서가 세상에 나온 지 18년이 됐다. 그 주에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Binance)에서 약 63억달러(약 8조4000억원)가 빠져나갔다.
피해의 절반 가까이를 묶어 둔 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처럼 백서가 덜어 내려던 중앙의 관리자였다. 비트코인 1만8270개는 백서의 설계대로 아무도 멈추지 못했다.
취소 창구 없는 전자화폐, 비트코인 백서가 선언한 약속
미국 동부시간 2008년 10월 31일 오후 2시 10분 한 암호학 메일링리스트에 ‘Bitcoin P2P e-cash paper’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보낸 사람은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였고, 한국 시간으로는 11월 1일 새벽 3시 10분이다. 글에 붙은 아홉 쪽짜리 논문이 비트코인 백서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두 달 뒤인 2009년 1월 3일 만들어진 비트코인의 첫 블록(제네시스 블록)에는 영국 더타임스 기사 제목이 새겨졌다. ‘재무장관, 은행 2차 구제금융 임박'(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이다.
백서 초록의 첫 문장은 약속을 한 줄로 담았다.
“순수한 개인 간(P2P) 전자화폐는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온라인 결제를 직접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1장은 문제부터 짚는다. 인터넷 상거래는 거의 전적으로 금융기관을 신뢰받는 제3자로 삼아 굴러가고, 이 신뢰 기반 모델에는 태생적인 약점이 있다는 진단이다. 사토시가 백서에서 내놓은 답은 “신뢰 대신 암호학적 증명에 기반한 전자결제 시스템”(an electronic payment system based on cryptographic proof instead of trust)이었다. 덜 알려진 대목도 있다. 백서는 되돌릴 수 없는 거래를 목표로 삼았다.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거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융기관이 분쟁 중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토시는 이어 “되돌릴 가능성이 있으면 신뢰의 필요가 퍼진다”(With the possibility of reversal, the need for trust spreads)고 적었다. 되돌리기 어려운 거래가 판매자를 사기에서 지켜 준다는 논리다. 구매자 보호는 에스크로(escrow) 같은 장치를 얹으면 된다고 했는데, 에스크로는 제3자가 대금을 잠시 맡아 두는 거래 방식이다.
은행 이체에는 취소 창구가 있다. 백서는 그 창구를 없애는 쪽을 골랐다.
본지가 백서 원문을 확인해 보니, 아홉 쪽 어디에도 지갑(wallet)이나 수탁(custody)이라는 낱말은 없다. 백서가 겨냥한 상대는 결제를 중개하는 금융기관이었다. 거래소는 그 뒤에 생겨난 새 제3자다.
20분 만에 열린 거래소 금고
바이낸스 지갑이 비기 시작한 건 10월 30일 새벽 5시 5분(한국 시간)이었다. 약 20분 사이 10개 블록체인에서 자산 대부분이 유출됐다. 털린 곳은 출금을 바로 처리하려고 인터넷에 연결해 둔 핫월렛(hot wallet)이다. 바이낸스는 공식 공지에서 추정 총영향을 약 63억달러로 밝히면서, 지갑 개인키가 유출된 증거는 없다고 했다.
바이낸스는 처음에 엔지니어 노트북 한 대를 의심했지만, 이후 조사에서 추가 침해 지점(additional points of breach)을 찾았다고 밝혔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 랩스(TRM Labs)는 10개 체인 가운데 9곳이 바이낸스 지갑의 일반 서명 송금으로 털렸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핫월렛 서명 인프라가 침해됐다고 평가했다. 백서 이후에 생겨난 신뢰받는 제3자가 사상 최대 규모로 뚫렸다.
열쇠는 그대로였고, 열쇠를 대신 돌려 주는 기계가 속았다.
멈춘 30억달러와 멈추지 않은 비트코인
바이낸스는 파트너들과 함께 약 30억달러(약 4조원)를 온체인에서 동결했다고 밝혔다. 동결은 발행사가 특정 주소에 있는 토큰의 이동을 막는 권한이다. TRM 랩스 집계로 테더(Tether)가 USDT 약 17억7000만개, 서클(Circle)이 USDC 약 8억2500만개를 묶었다. 리플(Ripple)의 RLUSD,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의 USD1, 아비트럼(Arbitrum) 보안위원회가 막은 몫이 뒤를 이었다.
명단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은 회사가 달러 가치에 맞춰 찍어 낸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고, 아비트럼에서는 위원 다수의 서명으로 긴급 조치를 하는 보안위원회가 움직였다. 버튼을 쥔 쪽이 있었기에 멈출 수 있었다.
비트코인은 달랐다. 바이낸스 비트코인 핫월렛에서 나간 1만8270개(탈취 시점 약 14억7000만달러, 약 1조9600억원)는 한 개도 동결되지 않았다. 비트코인에는 주소를 막을 중앙 발행사가 없다. TRM 랩스는 이 비트코인이 같은 블록 안에서 1000개, 100개 단위로 쪼개져 흘러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더리움 42만개 이상까지 더하면, 약 24억달러(약 3조2000억원)가 발행사가 얼릴 수 없는 자산으로 남았다.
백서는 사기꾼에게서 판매자를 지키려고 거래를 되돌릴 수 없게 설계했다. 이번에는 그 설계가 돈을 훔친 쪽을 지켰다. 우체통에 넣은 편지는 보낸 사람도 다시 꺼내지 못한다.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뚫린 것은 아니다. 털린 건 거래소의 서명 체계이고, 네트워크는 서명된 거래를 설계대로 처리했을 뿐이다.
거래소 대신 택한 하드웨어 지갑, 유통망과 펌웨어의 맹점
이런 사고 뒤에 늘 나오는 처방이 있다. 거래소에 맡기지 말고 개인키를 직접 쥐는 자기수탁(self-custody)이다. 키스톤 리서치 그룹 창업자 이만 샤피에이(Iman Shafiei)는 CNN에 보낸 답변에서 “보유할 생각이 든 순간 자기수탁 지갑으로 옮기라”(The moment you want to hold, move your crypto to a self-custody wallet)고 말했다.
같은 주 그 처방도 흔들렸다. 흔들린 쪽은 개인키를 인터넷과 떨어진 작은 기기에 보관하는 하드웨어 지갑이다. 트레저(Trezor)는 미국 시간 10월 30일 동남아의 옛 공식 리셀러 크립토빌리스(CryptoBilis)에서 팔린 세이프 5(Safe 5) 한 대에서 악성 하드웨어 임플란트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임플란트는 기기 안에 몰래 심은 부품이다. 트레저는 3월 이후 이 업체에서 기기를 산 고객에게 새 복구 문구로 자금을 옮기라고 권고했다. 도난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3주 전에는 렛저(Ledger)가 같은 리셀러를 거친 기기에서 승인되지 않은 하드웨어 임플란트를 확인했다. 피해 추산은 9300만달러(약 1240억원)까지 올라갔다. 7월 30일부터는 콜드카드(Coldcard) 지갑이 털렸다. 펌웨어 설정 오류로 기기가 키를 만들 때 쓰는 무작위 숫자인 난수(random number)를 하드웨어 대신 약한 소프트웨어에서 뽑았고, 공격자는 그 키를 추측해 냈다. TRM 랩스는 5200개가 넘는 주소에서 약 1816BTC(약 1억1600만달러)가 빠져나갔다고 집계했다.
| 사건 | 시점 | 뚫린 곳 | 피해 규모 |
|---|---|---|---|
| 바이낸스 | 2026년 10월 30일 (한국 시간) | 거래소 핫월렛 서명 체계 | 추정 총영향 약 63억달러 |
| 트레저 | 2026년 10월 30일 (미국 시간) 신고 | 리셀러 유통 기기(악성 임플란트) | 도난 신고 없음 |
| 렛저 | 2026년 10월 9일부터 확인 | 리셀러 유통 기기(악성 임플란트) | 추산 9300만달러 |
| 콜드카드 | 2026년 7월 30일부터 | 펌웨어 난수 생성 취약점 | 약 1816BTC |
은행 금고가 불안해 집 금고를 샀더니, 금고를 판 가게가 문제였다.
세 사건 모두 개인키를 기기 안에 가둔다는 하드웨어 지갑의 원리가 깨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기가 손에 닿기 전의 유통망과 키를 만드는 펌웨어에서 생겼다. 자기수탁도 신뢰를 없애지는 못하고, 믿는 대상이 거래소에서 지갑 제조사와 판매점, 기기 안의 코드로 바뀔 뿐이다.
18년 뒤에도 남은 신뢰
바이낸스는 손실을 회사 자금으로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30일 두 번째 사고 공지에서는 63억4000만달러(약 8조4600억원) 이상을 회사 자금으로 떼어 뒀고, 그중 50억달러는 도난된 것과 같은 토큰으로 들고 있다고 밝혔다. 출금은 약 34시간 안에 단계적으로 재개하고, 준비금 증명(PoR) 결과는 11월 2일까지 내놓겠다고 했다. 준비금 증명은 고객 자산만큼 코인을 실제로 들고 있는지 보여 주는 보고서다. 출금 재개 목표는 한국 시간으로 11월 1일 오후 2시 30분 전후이다.
이번 주 피해를 줄인 장치를 꼽아 보면 발행사의 동결, 거래소의 보전 약속, 분석업체의 추적이다. 셋 다 백서가 덜어 내려던 신뢰받는 제3자에 속한다. 백서도 구매자 보호는 에스크로 같은 장치를 그 위에 얹으면 된다고 적었고, 18년 동안 시장은 그 위에 층을 계속 쌓았다.
TRM 랩스는 지난 대형 해킹의 전례를 들어, 동결되지 않은 자금의 다음 행선지로 브리지와 스왑 서비스, 장외(OTC) 중개인을 꼽았다.
18년 전 백서가 지운 취소 창구는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