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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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원래 쉬운 것을 좋아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처리 유창성(Processing Fluency)’이라고 부른다. 뇌가 어떤 자극을 쉽게 처리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더 아름답다고, 더 옳다고 느낀다. 대칭인 도형, 또렷한 글씨, 몇 번 본 얼굴이 더 좋아 보인다. 예측대로 흘러가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의 진화 혹은 성장 과정에서 복잡성에 대한 탐구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다. 어려운 책을 끝까지 읽고, 낯선 전개의 영화를 두 번 보고, 처음 듣는 화성에 귀를 길들이면서 취향은 넓어져 왔다. 처리 유창성 이론은 이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복잡한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에서 그 예상보다 쉽게 읽히면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 그리고 훈련을 통해 복잡한 것을 처리하는 유창성 자체를 높인다는 것이다. 미술을 배운 사람이 비대칭을 좋아하고, 음악을 배운 사람이 불협화음을 꺼리지 않는 이유다. 서양 음악사에서 낯선 음정들이 처음엔 거부당하다가 반복해서 들리면서 받아들여진 것도 같은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단순하고 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 기본값이고, 비전문가일수록 그렇다. 그리고 그 기본값을 이겨내는 것은 반복과 훈련이다.
본 편에서는 이 처리 유창성을 통해 인간이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더 선호하게 되는 과정과 모방, 수렴에 대한 몇 가지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단순하고 쉬운 AI의 문장들… 사람은 AI의 문장을 선호했다
2024년 11월,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진이 1634명에게 시 10편씩을 읽게 했다. 참가자마다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 월트 휘트먼 등 시인 10명 가운데 한 명이 배정됐고, 그 시인의 시 5편과 챗GPT가 그 시인을 흉내 내 쓴 시 5편을 섞어 읽었다. 어느 쪽이 사람의 시인지 고르게 했고, 정답률은 46.6%에 불과했다. 무작위로 찍었을 때의 50%보다 낮은 수치였다. 별도의 696명에게 시 10편을 14개 항목으로 평가하게 하자 독창성 한 항목을 빼고는 모두 AI가 생성한 시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완성도 항목에서는 AI 시 다섯 편이 시인들의 시 다섯 편보다 전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참가자들이 판별 근거를 적은 글에서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은 사람의 시에 144번, AI의 시에 29번 나왔다. AI의 시가 주제가 분명하고 복잡한 은유가 없어 비전문가가 읽기 쉬웠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
미국 빌라노바대 연구진이 올해 발표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1682명에게 사람이 쓴 단편소설과 챗GPT가 쓴 단편소설 가운데 한 편씩을 읽고 점수를 매기게 했는데, 완성도와 몰입도 모두 AI 소설 쪽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별도의 실험에서 같은 주제로 쓴 사람의 소설과 AI의 소설을 함께 읽히고 어느 쪽이 AI인지 고르게 하자, 문장이 얼마나 쉽게 읽히는지를 근거로 골랐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틀렸다. 쉬운 쪽이 AI의 글이었던 것이다. 음악도 다르지 않았다. 독일 킬대와 함부르크대 연구진이 올해 초 공개한 연구(동료 심사 전 워킹페이퍼)에서는 참가자들이 어느 쪽이 AI가 생성한 곡인지 모르고 들을 때 AI 곡에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내렸다.
AI의 콘텐츠는 쉽고 직관적이다. 특히 AI의 대형언어모델(LLM)은 앞에 온 말 다음에 올 확률이 높은 말을 골라 문장을 잇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은 읽는 사람 쪽에서도 다음 말이 예상되는 문장이고, 예측 가능성이 높은 콘텐츠는 뇌가 처리하기 쉽다. 사람의 글은 더 미묘하고 복잡하여 읽는 데 더 많은 두뇌 노력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지적 노력이 더 드는 복잡한 콘텐츠보다 AI 생성 콘텐츠를 더 선호했다.
“AI가 이어 붙인 문장은 읽는 사람에게도 다음 말이 예상되는 문장이다. 예측하기 쉬운 콘텐츠는 뇌가 처리하기 쉽고, 사람들은 인지적 노력이 더 드는 복잡한 콘텐츠보다 그쪽을 더 선호했다.”
팟캐스트에서 ‘delve(파고들다)’가 44% 늘었다… 좋아하는 글은 따라 쓰게 된다
좋아하는 말투는 입에 붙는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발달연구소 연구진은 팟캐스트 82만4634편, 73만7083시간 분량의 대화를 분석해 챗GPT가 유독 자주 쓰는 ‘delve(파고들다)’, ‘meticulous(꼼꼼한)’, ‘intricacies(복잡한 세부)’ 같은 단어가 사람들의 즉흥적인 말에서도 늘어난 것을 확인했다. ‘delve’는 챗GPT 출시 뒤 13~18개월 사이 과학·기술 팟캐스트에서 챗GPT가 없었다면 나왔을 추정치보다 44% 더 많이 쓰였다. 연구진이 496명을 상대로 한 실험에서도 챗봇과 잠깐 대화한 참가자들은 그 대화에서 접한 단어를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AI의 글과 형식을 모방하고, 인간의 콘텐츠 역시 AI 창작물과 닮아간다. 서던캘리포니아대(USC)의 모르테자 데가니(Morteza Dehghani) 교수는 지난 5월 악시오스(Axios)에 “사람들은 이 이상화되고 매우 예측 가능한 형태의 언어에 익숙해진다. AI를 쓰지 않는 사람조차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글이라는 느낌을 얻으려고 LLM처럼 쓰기 시작한다”(People get used to this idealized, very predictable form of language, and even people who are not using it, in order to have that sense of powerful, influential writing, they start writing more like LLMs)고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AI의 콘텐츠를 모방하게 되면 우리는 AI식 콘텐츠에 더 많이 노출된다. 인간이 AI의 콘텐츠에 노출되는 양이 AI가 직접 만든 양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콘텐츠와 형식에 익숙해진다.
88만여건의 글이 비슷해졌다… 결국 취향은 수렴하고 있다
데가니 교수팀이 8월 발표한 연구는 논문 초록, 지역 뉴스, 레딧 게시물 등 88만여건의 글을 분석해 2022년 11월 챗GPT 출시를 기점으로 글의 복잡도 편차가 줄어들었음을 보여줬다. LLM에게 글을 다시 쓰게 한 실험에서는 인칭대명사와 대화체 표현의 쓰임도 단조로워졌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과 엑서터대 연구진이 2024년 발표한 실험에서는 약 300명에게 짧은 소설을 쓰게 하면서 한 집단에는 챗GPT가 만든 줄거리 아이디어를 줬다. AI의 아이디어를 받은 쪽의 글은 평가자 600명에게서 더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동시에 글들끼리는 서로 더 비슷해졌다. 각자는 AI를 쓸수록 더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더 쓰게 되고, 모두가 그렇게 한 결과로 전체의 다양성이 줄어든 것이다.
AI가 만들어내는 것 자체의 폭도 그리 넓지 않다. 스웨덴의 아렌트 힌체(Arend Hintze) 연구진은 작년 발표한 실험에서 이미지 생성 모델과 이미지 설명 모델을 마주 보게 놓고 사람 개입 없이 그림과 설명을 주고받게 했다. 서로 다른 주제의 문장 100개로 시작해 100번을 주고받는 동안 결과물은 고딕 성당, 폭풍 속 등대, 밤의 도시 같은 12개 모티프로 모였다. 새 데이터를 넣지 않으면 AI 자체의 콘텐츠도 평균점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이 좋아진다… ‘AI가 만들었다’는 표시는 변수가 될까
비슷한 것에 반복해서 노출되면 호감이 커진다. 심리학에서 아주 오래된 개념인 단순 노출 효과다. 아직 AI 생성 콘텐츠에 대한 단순 노출 효과를 직접 증명한 연구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효과가 AI에만 예외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비슷한 콘텐츠에 매일 노출되는 사람들의 취향이 그쪽으로 모여 그러한 콘텐츠를 재생성해낸다는 것 역시 가능한 추론이다.
이렇게 선호와 모방, 수렴을 거치며 AI 콘텐츠는 대중의 새로운 취향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는 7월 주주서한에서 올해 들어 약 300편의 작품에 생성형 AI 워크플로를 썼다고 밝혔다. 문예지 《n+1》에 실린 윌 태블린(Will Tavlin)의 글에 따르면 넷플릭스에서 일한 작가 여럿은 임원에게서 “인물이 지금 뭘 하는지 말하게 해서, 이 프로그램을 배경으로 틀어놓은 시청자도 따라올 수 있게 하라”(have this character announce what they’re doing so that viewers who have this program on in the background can follow along)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쉽고 직관적인 콘텐츠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서론에서의 처리 유창성 이론으로 돌아가면 주목할 만한 변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론에서는 유창성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이 미적 판단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말한다. 단, ‘그 감정의 출처가 의심받지 않을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실제로 앞서 본 피츠버그대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AI가 쓴 시라고 알려주면 어느 시든 점수가 내려갔고, 킬대 연구에서도 AI가 만든 곡이라고 알려주자 평가가 낮아졌다. 미국 미시간대 저스틴 버그(Justin Berg) 교수 등이 올해 발표한 연구에서는 16건의 실험 참가자 2만7000여명을 통틀어 같은 창작 글이라도 AI가 썼음을 밝히면 평가가 평균 6.2% 내려갔다.
최근 유럽과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AI 생성 콘텐츠에 대한 표시 의무가 도입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1월 22일 시행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인공지능기본법)에 따라 AI 사업자가 생성형 AI 결과물에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표시하도록 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소 1년의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 유럽연합은 8월부터 「인공지능법」 제50조를 적용하고 있다. 모든 콘텐츠에 AI 표시가 붙은 후에도 그 표시가 대중으로 하여금 감정의 출처를 의심하게 하는 변수로 남을지, 너무 흔해져 아무 변수도 아니게 될지는 미지수다.
AI 콘텐츠가 직관적이고 쉽기 때문에 사람들의 취향이 AI와 닮아가는 것 자체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일은 아닐 것이다. 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뇌의 기본값이고, 실험에서 AI의 글은 실제로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앞선 연구에서 살펴봤듯 각자의 선택은 합리적인데 그 합이 다양성을 줄이고, 줄어든 다양성은 개인의 선택 앞에서는 모습을 감춘다. 이미지 수렴을 연구한 힌체 연구진은 AI가 문화적 획일화를 가속하는 대신 창의적 다양성에 기여하려면 인간과의 지속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단순화는 일어나지만 서로 주고받는 피드백이 다양성을 지켜 준다는 문화 전달 연구처럼 말이다. 연구진은 여기에 더해 인공지능 모델 안에 스스로 수렴을 거스르는 역수렴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자의 선택은 합리적인데 그 합이 다양성을 줄이고, 줄어든 다양성은 개인의 선택 앞에서는 모습을 감춘다.”
쉬운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뇌는 원래 있었고, 그 기본값을 거슬러 온 것은 언제나 반복과 훈련이었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MA Film and Television 과정을 마치며 영화제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연구했다. 여러 산업에서 쌓은 실무 경험을 발판 삼아 지금은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저서로는 투자자들의 판단과 선택을 추적한 《미래에 베팅한 위대한 투자자들》(인물과사상사, 2026, 공저)이 있다. 《AI인사이트저널》에서는 영화·콘텐츠 산업과 교육 현장에서 나타나는 AI의 실제적 변화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