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칸 국제영화제는 베를린·베니스국제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매년 5월 전 세계 영화계의 시선이 모이는 곳이다. 올해 제79회 영화제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한국인으로는 처음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프랑스에서 열리지만, 이 영화제는 보수적이기로 유명하다. 직업과 등급에 따라 색이 다른 출입 배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을 나누고, 레드카펫 복장 규정도 까다롭기로 이름나 있다. 새로운 흐름 앞에서도 늘 신중한 쪽을 택해왔다. 2017년 넷플릭스(Netflix) 작품 두 편이 경쟁 부문에 오르자 이듬해부터 경쟁작에 프랑스 극장 개봉을 조건으로 걸었고, 넷플릭스는 2018년 칸 출품을 거둬들였다.
그런 칸이 AI 앞에서는 주저하고 있다. 아직 AI에 관한 공식 규정을 만들지 않았다. 칸이 생성형 AI가 주도한 작품을 황금종려상 후보에서 배제했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2026년 공식 선정 장편 규정」에는 AI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출품 자격 조항이 따지는 것은 제작 시기, 다른 영화제 상영 이력, 온라인 공개 여부, 프랑스 극장 개봉 여부다. 단편 경쟁 부문 규정과 공식 FAQ에도 AI 사용을 밝히라는 항목은 없다.
칸 시내에 걸린 AI 장편 영화… 문을 걸어 잠근 영화제의 경계선
칸 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5월 21일, 칸 시내의 극장 시네마 올랭피아(Cinéma Olympia)에서 95분짜리 장편 한 편이 상영됐다. 《헬 그라인드(Hell Grind)》라는 이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의 생성형 AI 스타트업 힉스필드 AI(Higgsfield AI)가 전편을 AI로 생성해 만든 작품이다. 제작비 50만달러(9월 16일 환율 기준 약 6억8000만원, 이하 같은 기준) 가운데 40만달러가 연산 비용으로 들어갔다.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이 이 영화를 칸영화제에서 데뷔하는 작품으로 소개하자마자 칸영화제 측은 이를 바로잡았다. 칸영화제가 테크 매체 퓨처리즘(Futurism)에 전한 입장은 “《헬 그라인드》가 칸영화제 공식 프로그램의 일부로 상영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는 한 문장이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올랭피아 상영은 칸영화제 측이 아닌 외부 업체가 마련한 업계 행사였다. 힉스필드 측은 필름마켓인 마르셰 뒤 필름(Marché du Film)에서도 따로 상영했다고 밝혔지만, 마켓 상영은 등록된 세일즈사가 상영료를 내고 상영을 예약하는 것일 뿐, 영화제의 작품 선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보다 앞선 4월에는 칸이라는 지명을 내건 AI 영화제도 열렸다. 4월 21~22일 칸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s) 등지에서 열린 제2회 월드AI영화제는 주최 측 발표에 따르면 배우 공리가 위원장,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감독이 명예위원장, 아녜스 자우이(Agnès Jaoui)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이름과 장소는 비슷해도 칸 국제영화제와는 별개 행사다. 스크린데일리(Screen Daily)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마티외 카소비츠(Mathieu Kassovitz) 감독은 “5000만~6000만달러가 들었을 프로젝트가 AI를 쓰면 2500만달러 가까이로 줄어든다”고 말했다. 우리 돈으로 680억~820억원이 들 영화를 340억원 안팎에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이 연기했음을 입증하라”… 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가 적기 시작한 규정
AI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는 몇 년 전부터 있었다. 2024년 뉴욕의 트라이베카영화제(Tribeca Festival)는 오픈AI(OpenAI)의 영상 생성 모델 소라(Sora)로 만든 단편 5편을 상영했다. 규정에 AI를 적는 곳은 올해 들어 나오기 시작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Venice Film Festival)는 지난해 규정에 없던 문구를 올해 영화제 목적 조항에 넣었다. “인공지능의 기여로 만들어진 작품을 포함해” 영화를 알리겠다는 내용이다. 공시 의무 같은 세부 조항은 붙지 않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Berlinale)는 출품 FAQ에 “AI를 사용한 작품도 받는다. 다만 제작에 AI를 썼다면 추가 정보를 요청할 수 있다”고 적어두었다.
아카데미의 규정은 보다 자세하다. NPR이 5월 2일 보도한 제99회 시상식 규정에 따르면 연기상 후보는 “본인 동의 하에 인간이 실제로 연기했음이 입증 가능한” 경우로 한정되고, 각본은 “인간이 저술한” 것이어야 한다. 불과 1년 전 아카데미는 보도자료에서 생성형 AI 같은 도구가 “후보 지명 가능성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다”고 했다. 중립이던 문장이 1년 만에 인간 저작 요건으로 바뀐 것이다.
“불과 1년 전 ‘후보 지명 가능성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다’던 아카데미는 ‘인간이 실제로 연기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조항으로 돌아섰다. 중립이던 영화계의 기준은 급격히 ‘인간 저작’의 증명으로 옮겨가고 있다.”
세일즈사 라벨부터 프랑스 지원금까지… 영화제 밖에서 쌓이는 새로운 기준
영화제 규정 밖에서는 기준이 하나둘 생기고 있다.
버라이어티(Variety)의 5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런던·뉴욕·토론토에 거점을 둔 국제 세일즈사 미장센 컴퍼니(The Mise En Scène Company)가 칸 마켓 기간에 AI 사용 표기에 대한 표준안 ‘휴먼 프로버넌스 인 필름(Human Provenance in Film)’을 공개했다. 이 회사가 2월 베를린 유럽필름마켓(EFM)에서 먼저 선보인 ‘AI 미사용’ 라벨을 ‘AI 미사용(No AI Used)’, ‘보조 AI(Assistive AI)’, ‘생성 AI(Generative AI)’ 세 단계로 넓혔다. 지금은 0.9 버전이고 10월 31일까지가 의견 수렴 기간이다. 사이트에서는 9월 현재 32개 국가·지역에서 적어도 130곳의 영화기금, 영화제, 시상기관, 방송사가 AI 사용 공시를 요구한다고 집계했다. 물론 칸영화제나 칸영화제의 필름마켓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는 지원금 요건을 손봤다. 프랑스 문화부가 공개한 연설문에 따르면 카트린 페가르(Catherine Pégard) 문화부 장관은 5월 16일 칸에서, 인간 저작자가 없는 작품에는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가 공적 지원을 하지 않고 더빙 지원도 사람 성우가 참여한 경우로 한정한다고 밝혔다. 장관은 “AI가 창작자를 대신하는 작품은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AI 사용 자체는 막지 않고, 공적 자금을 받을 자격에만 조건을 달았다. 퀼튀르긱(KultureGeek)에 따르면 CNC가 한 해 집행하는 지원금은 8억유로(약 1조2500억원)가 넘는다.
EU는 법으로 정했다.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FAQ에 따르면 EU 인공지능법(AI Act) 제50조의 투명성 의무가 8월 2일부터 적용되고 있다. AI 서비스 제공자는 생성하거나 조작한 콘텐츠에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표식을 달아야 하고, 딥페이크를 쓰는 쪽은 늦어도 처음 노출될 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딥페이크가 명백히 예술적이거나 허구적인 작품의 일부라면 “작품의 상영이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 적절한 방식”으로 알리면 된다. 영화라면 엔딩크레딧 표기로 충분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부산국제영화제도 AI를 다룬다. 제31회 영화제 기간인 10월 8~11일 열리는 포럼 비프(Forum BIFF)의 8개 세션 가운데 두 개가 AI 세션이다. 세션명은 “AI 영화의 미래: AI와 예술가는 공존할 수 있는가”와 “AI 시대의 새로운 창조성: 인간의 자리를 묻다”다. 아직은 규정을 논의하기보다 업계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 가까워 보인다.
칸이 AI 규정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규정을 만들려면 어디까지를 AI 작품으로 볼지부터 정해야 한다. 색보정에 AI 도구를 쓴 영화와 모든 장면을 생성한 영화를 한 문장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아카데미가 내건 ‘인간이 연기했음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건도 무엇을 입증으로 인정할지는 앞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사이 영화제 밖에서는 기준이 쌓이고 있다. 세일즈사는 3단계 라벨을 내놨고, 프랑스는 지원금 요건을 바꿨다. EU는 표시 의무를 법에 넣었다. 휴먼 프로버넌스 인 필름 의견수렴은 10월 31일 끝나고, 8월 2일 이전에 나온 AI 서비스에 주어진 EU 인공지능법 표식 의무 유예기간은 12월 2일 끝난다. 칸이 AI 규정을 만든다면 이런 기준들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규정 파일이 지난해 11월 올라온 점을 보면 제80회 규정도 두어 달 안에 나올 가능성이 높다.
“OTT 앞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던 칸이 규정집에 AI를 명시하거나 경쟁 부문에 올린다면, 그것은 영화계가 AI를 정식 경쟁 상대로 받아들였다는 결정적 신호가 될 것이다.”
OTT 앞에서도 한발 물러서 전통을 지키던 칸이 규정집에 AI를 적거나 AI로 만든 작품을 경쟁 부문에 올린다면 그건 영화계가 AI 영화를 정식 경쟁 상대로 받아들였다는 신호로 읽힐 것이다. 제80회 칸 국제영화제 규정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MA Film and Television 과정을 마치며 영화제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연구했다. 여러 산업에서 쌓은 실무 경험을 발판 삼아 지금은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저서로는 투자자들의 판단과 선택을 추적한 《미래에 베팅한 위대한 투자자들》(인물과사상사, 2026, 공저)이 있다. 《AI인사이트저널》에서는 영화·콘텐츠 산업과 교육 현장에서 나타나는 AI의 실제적 변화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