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구마노고도 순례에 AI 동행이 등장한 가운데, 종교적 순례는 인쇄술과 교통수단 등 새 기술에 맞춰 변해왔다는 분석이 나왔다. 더컨버세이션은 10월 8일 AI가 순례를 없애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바꿀 수 있다고 짚었다.
구마노고도 순례에 동행한 AI
2025년 종교학자 웨인 E. 아널드(Wayne E. Arnold)와 존 A. 슐츠(John A. Shultz)는 일본 와카야마현의 구마노고도(Kumano Kodō)를 여러 날 걸으며 스마트폰 AI 동반자의 안내를 받았다. 구마노고도는 신사와 불교 사찰을 잇는 옛 순례길이다. 두 연구자는 여행에 맞게 AI를 설정하고 번역 기능도 활용했으며, AI가 순례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살폈다. 이들의 기록은 국제종교관광순례학회지(International Journal of Religious Tourism and Pilgrimage)에 실렸다. 연구자들은 순례가 AI로 위축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맞게 다시 구성됐다고 평가했다.
순례는 시대와 종교에 따라 형태가 달랐다. 히브리 성경에는 농경 축제에 맞춰 신자들이 해마다 세 차례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명령이 등장하고, 신약성경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이 순례에 참여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로마의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 언급된 장소를 찾아 조용히 영적 여정을 떠났다. 이슬람교가 7세기에 등장한 뒤에는 무슬림의 메카 성지순례인 하지가 시작됐고,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순례·교역로가 형성됐다.
인쇄술과 교통수단도 순례를 바꿨다
순례객이 목적지를 찾고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돕는 정보 기술은 오래전부터 여정에 영향을 줬다. 4세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뒤에는 성지와 이동 경로를 적은 초기 여행 안내서가 등장했다. 에게리아라는 여성 순례객과 ‘보르도 순례자’로 불리는 익명의 여행자가 남긴 기록은 성지 여행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1486년에는 베른하르트 폰 브레이덴바흐(Bernhard von Breydenbach)가 목판 지도와 삽화를 담은 성지 안내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독일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스페인어로 번역됐고, 1500년까지 적어도 12차례 재판됐다. 직접 여행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책의 그림과 설명을 통해 성지를 접할 수 있었다.
교통 기술은 순례 여정의 길이와 성격도 바꿨다. 19세기 증기선과 20세기 항공 여행이 보급되면서 메카로 향하던 육상 하지 경로는 대부분 사라졌고, 장거리 이동은 짧아졌다. 그 결과 순례에서 이동 과정의 비중은 줄고 목적지의 성지와 사원을 방문하는 데 초점이 더 맞춰졌다. 다만 순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기 마르틴 루터는 1520년 순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순례와 이를 둘러싼 정보의 확산은 계속됐다.
사진과 영화, 인터넷도 순례객이 여정을 준비하고 경험을 나누는 방식을 바꿨다. 안내서로 장소를 확인하던 여행객은 사진을 보고, 현지 안내자에게 연락하고, 숙소를 미리 예약하거나 온라인 게시판에서 정보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는 계획을 쉽게 하고 인기 있는 경로를 부각하는 한편, 여정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안전을 보완했다는 게 더컨버세이션의 설명이다. AI 동반자 역시 이처럼 순례의 준비와 이동에 관여하는 새 기술로 제시됐다. 다만 구마노고도 사례는 두 학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기사에는 AI가 순례 전반에 미칠 영향을 측정한 통계나 다른 순례객의 반응은 제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