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앤트로픽(Anthropic)과 오픈AI(OpenAI), 구글(Google), 스페이스XAI(SpaceXAI)가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함께 늦추기로 합의한 사실이 미국 반독점법 위반이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AI 안전을 위해 경쟁사들이 기술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협력이 셔먼법(Sherman Act)이 금지하는 담합에 해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블룸버그 로는 9월 18일 “챗GPT·클로드·그록·제미나이 유료 이용자들이 앤트로픽·오픈AI·스페이스XAI·구글이 AI 개발 속도를 공동으로 늦추기로 불법 합의했다고 주장하며 소송(뷰이스트 외 대 앤트로픽, Buist et al. v. Anthropic PBC et al., 3:26-cv-10693)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원고들은 “경쟁사들이 제품 개선 속도를 제한해 유료 이용자들이 정상적인 경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기술 개선을 받지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소송은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9월 18일 제기됐다. 원고는 AI 서비스 유료 이용자 찰스 뷰이스트(Charles Buist), 샤이엔 헌트(Cheyenne Hunt), 크리스틴 불록(Christine Bullock), 닉 스페차스(Nick Spetsas)다.
AP는 9월 19일 “원고들이 챗GPT·클로드·그록·제미나이의 미국 내 유료 가입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소송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AP에 따르면 피고 4개 회사는 9월 19일 현재 논평 요청에 즉각 답하지 않았다.
아모데이의 ‘AI 속도 조절론’에서 시작
소송의 직접 계기는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가 9월 12일 공개한 글이다.
아모데이는 ‘우리는 프런티어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We Must Pace the Frontier)’라는 글에서 최첨단 AI의 능력이 지나치게 빠르게 향상될 경우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며 AI 기업 간 안전 협력을 제안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부가 기업 간 논의를 중재하거나 특정한 안전 논의에 한정해 좁은 범위의 반독점법 적용 예외를 마련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원고들은 같은 날 경쟁 AI 기업 경영진이 아모데이의 제안에 공개적으로 호응한 점을 ‘합의’의 근거로 제시했다. 블룸버그 로는 “스페이스XAI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제안을 지지한 데 이어 오픈AI CEO 샘 올트먼(Sam Altman)이 호응했고,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 공동창업자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는 이를 ‘올바른 전진 경로(the right path forward)’라고 평가했다고 원고들이 주장했다”고 전했다.
AP도 “원고들이 9월 12일 아모데이의 제안과 머스크·올트먼·허사비스의 공개적인 호응을 AI 기업 간 개발 속도 조절 합의의 핵심 근거로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혼자 늦추는 것은 문제없지만 함께 늦추면 담합”
원고들은 개별 AI 기업이 안전을 이유로 자체적으로 개발 속도를 늦추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AP에 따르면 원고들은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안전 조치를 강화하거나 개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경쟁사끼리 합의해 ‘개별 책임을 집단적 제한으로 대체(substitute collective restraint for individual accountability)’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원고들은 또 “반독점법은 경쟁사들이 서로 경쟁하는 제품을 얼마나 빨리 개선할지를 합의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며 “의회는 그러한 합의에 어떤 면책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원고 측 논리는 AI 모델의 개발 속도도 가격이나 생산량처럼 경쟁의 대상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한 회사가 독자적으로 개발을 늦추면 경쟁사가 더 좋은 모델을 내놓으면서 고객과 매출, 인재를 빼앗길 수 있지만 경쟁사들이 모두 속도를 늦추면 이런 경쟁 압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원고들은 이를 경쟁사 간 생산량 제한과 유사한 수평적 경쟁 제한이라고 주장하며 셔먼법 제1조 위반을 지적했다. 손해배상과 함께 클레이턴법(Clayton Act)에 근거해 경쟁사들이 공동으로 AI 개발 속도를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명령도 요구했다.
첫 쟁점은 ‘안전 목적’보다 실제 ‘합의’ 있었나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법원이 처음부터 ‘AI 안전을 위한 담합을 허용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원고들이 셔먼법 제1조가 요구하는 경쟁사 간 ‘계약·결합·공모(contract, combination, or conspiracy)’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
미 연방대법원은 2007년 벨 애틀랜틱 대 트웜블리 사건(Bell Atlantic Corp. v. Twombly, 550 U.S. 544)에서 경쟁 기업들이 비슷하게 움직이는 ‘평행행위(parallel conduct)’ 자체만으로 불법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연방대법원 판결은 “단순히 기업들의 행동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넘어 실제 합의가 있었다고 개연성 있게 볼 수 있는 사실이 제시돼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아모데이의 공개 제안에 머스크·올트먼·허사비스가 공개적으로 호응했다는 사실과, 이들이 실제로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합의를 맺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매체들은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이번 사건을 “AI 안전이라는 공익 목적이 담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만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먼저 법원은 원고들이 제시한 공개 발언과 다른 정황이 셔먼법상 합의를 주장하기에 충분한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번 행위가 가격 담합이나 시장 분할처럼 별도의 경쟁 효과 분석 없이 위법성을 인정하는 ‘당연위법(per se illegal)’에 해당할지, 경쟁 제한 효과와 효율성 등을 함께 따지는 ‘합리의 원칙(rule of reason)’을 적용할지도 아직 법원의 판단이 나오지 않았다.
소송 사흘 전 FTC도 ‘AI 반독점 면제’에 경계
이번 소송은 AI 안전 협력에 반독점법 적용을 일부 면제해 달라는 요구를 놓고 미 경쟁당국에서도 논란이 시작된 직후 제기됐다.
로이터는 9월 15일 “앤드루 퍼거슨(Andrew Ferguson)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이 AI 기업들이 새로운 규제를 요구하는 동시에 반독점법 적용 예외를 요구하는 데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퍼거슨은 자신의 발언이 개인적 견해이며 연방정부의 AI 정책은 대통령이 결정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아모데이는 AI 기업들이 안전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정부가 특정한 안전 논의에 대해 좁은 범위의 반독점법 적용 예외를 허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반면 AP에 따르면 올트먼은 일관된 안전 기준을 만드는 연방 차원의 제도에는 찬성하면서도 이런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반독점법 면제나 새로운 법률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쟁사 간 안전 협력 자체가 곧바로 반독점법 위반인 것은 아니다. 미 법무부(DOJ)와 FTC는 사이버보안 정보 공유에 관한 반독점 정책성명에서 적절하게 설계된 사이버 위협 정보 공유는 일반적으로 반독점 우려를 일으키지 않으며 경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경쟁사들이 가격이나 생산량, 경쟁 전략처럼 시장 경쟁의 핵심 요소를 함께 제한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들은 AI 기업들이 단순히 안전 정보를 교환하려 한 것이 아니라 경쟁의 핵심 요소인 모델의 개발·성능 개선 속도 자체를 공동으로 제한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AI 안전 공조’에 반독점법이라는 새 변수
법원은 피고 기업들이 실제로 개발 속도 제한에 합의했는지, 그러한 합의가 실행됐는지, 소비자에게 경쟁상 손해가 발생했는지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AI 안전을 둘러싼 업계 공동행동과 반독점법 사이의 긴장은 소송 전부터 공개적으로 제기돼 왔다. 대형 AI 기업들이 안전을 이유로 정부 규제와 경쟁사 간 협력을 동시에 요구하면 기존 사업자를 신규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반론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캐나다 AI 기업 코히어(Cohere)의 공동창업자 에이단 고메즈(Aidan Gomez)는 아모데이의 반독점법 면제 구상에 대해 “대형 AI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규칙을 만들 위험이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보도에서 퍼거슨 FTC 위원장은 AI 기업들이 규제와 반독점법 면제를 동시에 요구하는 상황에 대해 “모두가 깊이 의심해야 한다(everyone should be deeply suspicious)”고 말했다.
Q&A
Q1. 앤트로픽·오픈AI·구글·스페이스XAI가 실제로 담합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나?
아니다. 현재 확인된 것은 소비자 4명이 네 회사가 AI 개발 속도를 공동으로 늦추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이다. 법원이 합의나 반독점법 위반을 인정한 단계가 아니다.
Q2. CEO들이 공개적으로 같은 제안에 찬성하면 셔먼법상 ‘합의’가 되나?
자동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셔먼법 제1조는 계약·결합·공모 등 경쟁사 간 합의를 요구한다. 트웜블리 판결에 따르면 기업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평행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번 사건에서는 CEO들의 공개적인 호응과 다른 정황이 실제 공동행동을 뒷받침하는지가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Q3. AI 안전을 위해 경쟁사들이 협력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가?
그렇지 않다. DOJ와 FTC는 사이버보안 위협 정보처럼 적절한 안전 정보 공유는 반독점법상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이번 소송의 원고들은 정보 공유가 아니라 경쟁사들이 제품 개발과 성능 개선 속도 자체를 함께 제한하기로 했다고 주장한다.
Q4. ‘당연위법’과 ‘합리의 원칙’ 중 어떤 기준이 적용되나?
아직 법원이 결정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경쟁사들의 공동 개발 속도 제한을 생산량 제한과 유사한 수평적 경쟁 제한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법원이 그 법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에 앞서 셔먼법 제1조가 요구하는 경쟁사 간 합의가 존재했다는 주장이 법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도 다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