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엘리자’, AI 기원 다루면서 인간성 살리지 못해

멜버른 시어터 컴퍼니(Melbourne Theatre Company)의 연극 ‘엘리자’가 AI의 기원을 다루면서도 인물들의 인간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디언은 10월 3일 톰 할러웨이(Tom Holloway)의 신작을 리뷰하며, AI 논쟁의 핵심을 짚으려는 시도는 야심 차지만 초현실적 연출이 인물과 관객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평했다.

1966년 MIT에서 시작된 AI 이야기

극에서는 1966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독일계 미국인 컴퓨터 과학자 조지프 바이젠바움(Joseph Weizenbaum)이 동료 론, 비서 베키와 일하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한다. 바이젠바움은 심리치료 대화를 흉내 내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프로그램은 상대의 말을 되풀이하고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느끼나요?” 같은 열린 질문을 던진다. 가디언은 이 프로그램이 인공지능의 시작점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정작 바이젠바움은 그런 해석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계가 언젠가 생각할 수 있다는 앨런 튜링의 이론을 반박하려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프로그램이 자신을 이해하고 필요한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특히 베키가 엘리자에게 마음을 여는 모습은 프로그램의 실제 이해 능력보다, 1960년대 컴퓨터 과학계의 남성 중심적 환경에서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는 감각과 맞닿아 있다고 리뷰는 짚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 주인공에서 따왔다.

초현실적 연출과 인물의 거리

초반에는 과학적 발견을 차분히 되짚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후 인물들의 행동이 낯설고 기이해지며 심리 공포극에 가까운 분위기로 옮겨간다. 가디언은 오슨 웰스가 연출한 카프카의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무대와 조명도 언급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흰 서류 상자와 회전하는 기계 장치는 주인공이 갇힌 듯한 작업 환경을 만들고, 위생적으로 보일 만큼 차가운 조명은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다.

리뷰는 이런 초현실적 접근이 관객을 불안하게 하고, 현실이 얼마나 쉽게 모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라고 봤다.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위치에 서지 못하게 해 ‘모방 게임’ 안에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인물들이 상징이나 암호 같은 존재로 바뀌면서 감정적 공감은 약해진다고 지적했다. AI를 둘러싼 불안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연출이 오히려 이야기의 인간적인 면을 흐린다는 평가다.

연출을 맡은 페이지 래트레이(Paige Rattray)는 과장된 연극성과 급격한 분위기 변화를 밀어붙이며 빠른 전개를 이끈다. 바이젠바움을 연기한 댄 스필먼(Dan Spielman)은 프로그램의 반응에 점점 당혹스러워하는 과학자를 중심에 세웠고, 해미시 마이클(Hamish Michael)은 여러 인물을 맡아 과장된 억양으로 웃음을 이끌었다. 베키 역의 마날리 다타르(Manali Datar)도 날카로움과 위로를 오가는 연기를 선보였다고 가디언은 평했다. 리뷰는 이 작품이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느냐보다 사람들이 기계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는 일이 더 큰 문제라는 주장을 담았다고 봤다. 다만 AI의 출발점과 도덕적 책임을 다루는 연극이라면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감각을 갖췄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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