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인과 경영진, 배우들이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영화 제작에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를 구분하는 공동 기준을 공개했다. AI 사용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인간의 창작적 통제 아래 있는 AI의 보조 작업과 인간 배우·창작자를 대체하는 생성형 AI를 구별하자는 것이다. 미국 저작권청이 AI 시대에도 저작권의 핵심 요건으로 ‘인간 저작자’를 유지하는 가운데,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이를 실제 작업 방식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셈이다.
8월21일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루카스필름을 이끌어온 캐슬린 케네디(Kathleen Kennedy)와 미국영화연구소(AFI) 학장 수전 러스킨(Susan Ruskin)은 2023년 11월부터 영화·기술 업계 관계자들의 비공개 논의를 주도해 왔다. 최근 약 120명이 참석한 회의를 거쳐 이들은 ‘인간 생성 워크플로(Human Generative Workflows)’라는 프레임워크를 처음 공개했다.
이 논의에는 배우이자 인터포지티브 공동창업자인 벤 애플렉, A24 파트너 스콧 벨스키, CAA 에이전트 그레그 시걸, 파라마운트+ 오리지널 부문 임원 크리스 파넬, 영화감독 존 애브넷 등 영화 제작과 투자·배급을 아우르는 인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프레임워크를 처음 공개한 디 앵클러는 8월20일 이 논의를 ‘인간이 통제하는 AI(human-controlled AI)’를 지향하는 시도로 소개했다. 케네디와 러스킨이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 인사들을 연결해 3년 가까이 논의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AI라는 한 단어로 모두 묶지 말자”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영화 산업에서 ‘AI’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넓게 쓰인다는 점이다.
영상의 색상이나 화질을 보정하는 기술부터 배우를 대신하는 합성 연기까지 모두 AI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프레임워크는 이를 서로 다른 제작 행위로 분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컨대 업스케일링·샤프닝(저해상도 영상을 고해상도로 개선하고 선명도를 높이는 작업)이나 마커리스 모션캡처(markerless motion capture·몸에 센서를 부착하지 않고 영상 분석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기술)처럼 기존 창작자의 작업을 보조하는 머신러닝 기술은 인간의 창작 과정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인간의 목소리나 외모·연기를 대신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생성형 자산은 성격이 다르다고 구분했다. 프레임워크는 핵심적인 경계를 ‘인간의 창작적 비전을 지원하는 도구와 과정’과 이를 대체하는 프롬프트 기반 생성 도구의 차이로 설명한다.
이는 AI 기술 자체보다 최종 표현을 누가 창작적으로 결정했는가를 따지는 접근이다.
미 저작권청도 “AI 보조는 가능, 인간 창작이 핵심”
이 구분은 미국 저작권청의 AI 저작권 원칙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미 저작권청은 2025년 1월29일 공개한 AI와 저작권 보고서 제2부에서 생성형 AI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저작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인간 저작자가 충분한 표현적 요소를 결정했다면 AI를 창작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행위만으로는 일반적으로 저작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인간이 AI 결과물을 창의적으로 선택·배열하거나 수정한 부분 등은 보호될 수 있다. 저작권청은 이미 AI 생성물이 포함된 수백 건의 작품을 등록하면서 인간이 창작한 부분을 보호 대상으로 인정해 왔다.
따라서 할리우드 프레임워크가 자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저작권 보호가 가능하다”고 분류하더라도 그 판단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실제 저작권 인정 여부는 인간의 구체적인 창작 기여를 기준으로 개별적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된다. 미 저작권청 보고서는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의 2023년 생성형 AI 저작권 안내서를 소개하면서 한국 역시 자연인만 저작자가 될 수 있고, 사람이 AI 결과물의 표현을 창작적으로 수정·추가한 부분 등은 보호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우의 얼굴·목소리는 저작권만으로 해결 안 돼
하지만 AI가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문제는 저작권보다 복잡하다.
미 배우·방송인 노동조합 SAG-AFTRA는 2023년 TV·영화 계약에서 배우의 ‘디지털 복제물(digital replica)’에 관한 별도 보호 장치를 마련했다. SAG-AFTRA의 디지털 복제물 지침에 따르면 제작사가 배우의 목소리나 외모를 디지털 복제물로 만들거나 사용할 경우 원칙적으로 배우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하며, 사용 목적도 구체적으로 알려야 한다. 배우는 디지털 복제물 사용에 대한 보상을 받을 권리도 갖는다.
SAG-AFTRA의 계약은 인간 배우와 닮지 않은 완전한 디지털 캐릭터인 ‘합성 배우(Synthetic Performer)’도 별도로 규정한다. 제작사가 인간이 맡을 수 있었던 역할을 합성 배우로 대체할 경우 노조에 통지하고 적절한 조건에 대해 협의하도록 하는 장치가 포함돼 있다.
미 저작권청 역시 디지털 복제물 문제는 기존 저작권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저작권청은 2024년 보고서에서 사람의 이미지나 목소리를 무단으로 복제해 유통하는 행위를 규율할 연방 차원의 별도 권리를 의회가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할리우드의 새 프레임워크가 앞으로 배우의 동의와 보상까지 논의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배경이다.
AI 학습데이터·일자리 문제는 기준에서 제외
다만 프레임워크의 범위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이 그룹은 생성형 AI 모델이 영화·대본·음악 등 기존 저작물을 어떤 방식으로 학습하는 것이 허용되는지에 대해서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AI가 영화 산업의 일자리에 미칠 영향도 다루지 않았다고 밝혔다. 버라이어티는 이 두 문제가 현재 창작 업계의 가장 민감한 AI 쟁점 가운데 일부라고 전했다.
미 저작권청도 AI 학습 문제를 저작물의 저작권 인정 문제와 별도로 다루고 있다. 저작권청의 AI 연구 자료에 따르면 2025년 5월 공개된 보고서 제3부 사전공개본은 생성형 AI 학습에 저작물을 이용하는 데 따른 법률 문제와 라이선스, 잠재적 책임 등을 분석했다.
따라서 ‘Human Generative Workflows’는 할리우드 전체가 합의한 AI 규칙이나 새로운 법적 기준은 아니다. 제작자·배우·기술기업 관계자들이 AI를 하나의 기술로 뭉뚱그리지 말고 인간의 통제 수준과 사용 방식에 따라 구분하자고 제시한 민간 프레임워크에 가깝다.
그럼에도 의미는 있다. 할리우드의 AI 논쟁이 ‘AI를 사용할 것인가’라는 찬반 구도에서 **‘어떤 AI 사용은 창작 보조이고, 어느 지점부터 인간 창작의 대체인가’**라는 구체적인 제작 공정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Q&A
Q1. ‘Human Generative Workflows’는 새로운 할리우드 규정인가.
아니다. 법이나 노사협약이 아니라 영화·기술 업계 관계자들이 공통 용어와 분류 기준을 만들기 위해 제안한 민간 프레임워크다.
Q2. AI를 사용한 영화도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나.
가능하다. 미 저작권청은 AI가 창작을 보조하더라도 인간이 충분한 표현적 요소를 결정했다면 인간의 창작 부분은 보호받을 수 있다고 본다. AI 사용 여부 자체가 기준은 아니다.
Q3. 프롬프트를 자세히 작성하면 AI 결과물 전체에 저작권이 생기나.
그렇다고 볼 수 없다. 미 저작권청은 프롬프트 제공만으로는 일반적으로 인간 저작자에게 필요한 수준의 창작적 통제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선택·배열·수정 등 구체적인 인간의 창작 기여가 중요하다.
Q4. 배우의 AI 얼굴이나 목소리는 왜 별도 문제인가.
저작권만이 아니라 초상·퍼블리시티권과 계약, 노동권 문제가 함께 발생하기 때문이다. SAG-AFTRA 계약은 배우의 디지털 복제물에 대해 사전 동의와 구체적인 사용 설명, 보상 등의 장치를 두고 있다.
Q5. 가장 큰 쟁점인 AI 학습데이터 문제도 이 프레임워크에 포함됐나.
아니다. 프레임워크는 AI 모델의 학습데이터와 일자리 영향은 다루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AI 기업과 저작권자 간 학습데이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