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블랙먼데이(Black Monday·뉴욕 증시가 하루 만에 22% 넘게 폭락한 사건)’를 예측해 유명해진 억만장자 투자자 폴 튜더 존스가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MS) 주식을 대폭 늘리는 동시에 옵션을 활용한 헤지(가격 하락 위험을 줄이기 위한 방어 거래)를 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AI 인프라의 장기 성장에는 베팅하면서도 최근 급등한 반도체 종목의 조정 가능성에는 대비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존스가 이끄는 튜더 인베스트먼트가 올해 2분기 엔비디아·마이크론·MS·TSMC 등 주요 AI 종목의 포지션을 크게 조정했다고 모틀리 풀(The Motley Fool)이 8월21일 보도했다.
폴 튜더 존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매크로 헤지펀드 투자자다. 1987년 미국 증시 대폭락을 사전에 예상한 거래로 약 1억달러(약 1387억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13F(미국 기관투자가가 분기별로 공개하는 주식 보유 보고서)에 따르면 튜더 인베스트먼트의 2분기 보고 포트폴리오 가치는 약 719억달러(약 99조7000억원)로, 1분기 약 539억달러보다 크게 증가했다. 13F는 6월30일 기준이며 8월14일 제출됐다.
엔비디아 주식 137% 늘렸다
존스의 AI 투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엔비디아다. 튜더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엔비디아 보통주는 1분기 약 98만5000주에서 2분기 약 234만주로 137%가량 증가했다.
엔비디아는 AI 모델 학습과 추론에 사용되는 GPU(그래픽처리장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글로벌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면서 AI 인프라 투자 확대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혀 왔다.
다만 존스는 엔비디아 주가 상승에 일방적으로 베팅하지 않았다. 주가가 하락할 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풋옵션(미리 정한 가격에 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도 소폭 늘렸다. 반면 콜옵션(미리 정한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은 크게 줄였다. 현물 주식은 늘리면서 단기 변동성에는 대비한 셈이다.
엔비디아는 AI 추론(inference·학습을 마친 AI 모델이 실제 질문에 답하거나 결과를 생성하는 과정) 기술도 강화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12월 AI 반도체 스타트업 그록(Groq)의 추론 기술을 비독점 방식으로 라이선스했으며, 그록 경영진 일부도 엔비디아에 합류했다. 그록은 독립 기업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그록은 지난 8월17일 3억5000만달러(약 4854억원)의 투자 유치를 발표하면서 기업가치를 35억달러(약 4조8500억원)로 평가받았고 엔비디아도 투자 참여 계획을 밝혔다. 두 회사의 관계는 인수가 아니라 기술 라이선스와 투자·사업 협력에 가깝다.
TSMC 340% 확대… AI 반도체 제조에 베팅
튜더 인베스트먼트가 가장 공격적으로 늘린 AI 핵심 종목 가운데 하나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였다. TSMC 보통주 보유량은 한 분기 만에 약 340% 증가했다.
TSMC는 대만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이다. 엔비디아와 AMD를 비롯한 주요 AI 반도체 설계 업체들이 최첨단 칩 생산을 TSMC에 의존하고 있어 특정 AI 반도체 기업의 승패와 관계없이 AI 인프라 투자 확대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기업으로 평가된다.
튜더 인베스트먼트의 2분기 13F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TSMC 주식은 약 31만주에서 137만주로 증가했다. MS 역시 약 67만주에서 167만주로 늘었고 엔비디아는 약 98만주에서 234만주로 증가했다.
그러나 TSMC에서도 존스는 풋옵션을 두 배 이상 늘렸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할 경우 막대한 설비를 보유한 파운드리 기업의 가동률과 이익률이 동시에 하락할 위험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론에는 가장 강한 경계 신호
반대로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존스는 마이크론 보통주 비중을 줄이고 콜옵션을 대폭 축소한 반면 풋옵션은 늘렸다.
마이크론은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다. AI 가속기에 사용되는 HBM(고대역폭메모리·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메모리) 수요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의 수혜를 받아왔다.
문제는 메모리 산업 특유의 사이클이다.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생산능력 확대를 촉발하고 이후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급락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존스의 포지션 변화는 AI가 메모리 수요를 장기간 끌어올릴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급등 이후의 하락 위험을 함께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MS도 현물 늘리고 하락 위험 대비
MS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략이 나타났다. 튜더 인베스트먼트는 MS 보통주를 크게 늘렸고 풋옵션도 비슷한 규모로 확대했다. 콜옵션은 대폭 줄였다.
MS는 미국의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클라우드 기업 가운데 하나다. 애저(Azure) 클라우드와 기업용 소프트웨어에 AI 기능을 결합하고 있으며 오픈AI와의 협력을 통해 생성형 AI 시장을 선점해 왔다.
존스의 포트폴리오는 AI 산업 자체에 대한 약세 전환이라기보다 ‘AI 승자는 보유하되 가격 위험은 헤지한다’는 전략에 가깝다. 엔비디아·TSMC·MS의 현물 보유를 크게 늘렸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2분기 미국 기관투자가 전체에서도 AI 투자에 대한 시각은 엇갈렸다. SEC에 제출된 6371개 기관의 13F를 분석한 결과, 대형 기술주를 줄인 기관과 늘린 기관이 팽팽하게 맞선 반면 반도체 업종에서는 매수한 기관이 매도한 기관보다 많았다고 로이터가 8월14일 보도했다.
존스의 거래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던진다. AI 인프라 투자의 장기 성장 가능성에는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엔비디아·TSMC·MS 등에 풋옵션을 함께 보유해 AI 투자 사이클이 꺾일 경우의 충격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AI 관련주가 지난 수년간 급등하면서 앞으로는 ‘AI 산업이 성장하느냐’보다 ‘현재 주가가 그 성장 가능성을 얼마나 미리 반영했느냐’가 투자 수익률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졌다. AI 장기 성장과 AI 주가의 지속적인 상승이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얘기다.
Q&A
Q1. 폴 튜더 존스는 AI주에 대해 약세로 돌아선 것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엔비디아·TSMC·MS 보통주를 크게 늘렸다. 다만 풋옵션도 병행해 주가 하락 위험에 대비했다.
Q2. 가장 적극적으로 늘린 AI 핵심주는 무엇인가.
TSMC와 엔비디아가 대표적이다. TSMC 보통주는 약 340%, 엔비디아는 약 137% 증가했다. MS 보유량도 크게 늘었다.
Q3. 왜 마이크론에는 상대적으로 신중한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가격 상승과 공급 확대,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이 반복되는 경기 순환성이 강하다. AI 수요가 강하더라도 이 사이클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경계한 것으로 풀이된다.
Q4. 엔비디아가 그록을 인수했나.
아니다. 양사는 2025년 12월 비독점 추론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그록은 독립 기업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엔비디아는 그록의 2026년 8월 투자 라운드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Q5. 존스의 투자 전략에서 읽을 수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AI 산업의 장기 성장과 AI 주식의 단기 주가 흐름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핵심 AI 기업의 현물 주식은 확대하면서 옵션으로 급락 위험을 방어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