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이 어도비(Adobe)가 불법 전자책 저장소 ‘안나스 아카이브(Anna’s Archive)’에서 저작물을 가져와 엔비디아(NVIDIA)의 인공지능(AI) 모델 ‘네모트론(Nemotron)’을 학습시켰다는 작가의 저작권 침해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AI 기업이 대규모 도서 데이터를 이용했다는 정황만으로 특정 불법 데이터베이스에서 원고의 책을 가져갔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소송 전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법원은 네모트론 관련 청구에 한해 원고가 소장을 보완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어도비의 자체 소형언어모델(SLM) ‘SlimLM’을 둘러싼 저작권 침해 청구에 대해서는 심리가 계속된다.
8월20일 미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 결정문에 따르면 재클린 스콧 코를리(Jacqueline Scott Corley) 연방지방법원 판사는 작가 E. 몰리 탠저(E. Molly Tanzer)가 제기한 직접 저작권 침해 청구 가운데 네모트론과 관련된 부분을 기각했다. 법원은 이날 구두변론을 거쳐 어도비의 소각하 신청(Motion to Dismiss)을 받아들였다.
핵심은 어도비나 엔비디아가 실제로 안나스 아카이브에서 탠저의 책을 가져와 네모트론 학습에 사용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소장에 담겨 있는지 여부였다.
코를리 판사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결정문은 탠저의 주장이 “정보와 신념에 근거해(upon information and belief)” 제기됐지만, 어도비가 원고의 저작물을 안나스 아카이브에서 취득했다는 추론을 ‘가능한(possible)’ 수준에서 ‘개연성 있는(plausible)’ 수준으로 끌어올릴 구체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판사는 “결론적인 주장을 소장에서 여러 차례 반복한다고 해서 그 주장의 결론적 성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지적했다. 결국 누가 학습을 수행했는지를 떠나 네모트론이 안나스 아카이브의 자료, 나아가 탠저의 저작물로 학습됐다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만한 사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188만권 학습 추정”만으로 불법 데이터 출처 입증 못 해
탄저는 최소 3권의 등록 저작권을 보유한 작가다. 그는 5월18일 어도비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면서 네모트론과 SlimLM 개발 과정에서 자신의 책이 허가 없이 복제·사용됐다고 주장했다. 탠저의 소장에 따르면 원고는 어도비와 엔비디아가 수백만권의 책을 합법적으로 확보했다는 공개 자료가 없다며 안나스 아카이브 같은 ‘섀도 라이브러리(shadow library·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대량의 책과 논문 등을 제공하는 온라인 저장소)’에서 책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고 측 논리는 네모트론의 학습 데이터 규모에서도 출발했다. 법원 결정문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2024년 2월 공개한 Nemotron-4 15B의 전체 학습 말뭉치는 8조 토큰이었으며 이 가운데 영어책이 2406억 토큰을 차지했다. 탄저 측은 이를 평균적인 소설 분량과 비교해 약 188만1250권의 영어책이 학습에 사용됐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법원은 “많은 책을 학습했다”는 사실 또는 추정과 “그 책들을 안나스 아카이브에서 불법으로 취득했다”는 사실 사이에 증거상의 공백이 있다고 봤다.
탠저 측은 어도비와 엔비디아의 협력 관계도 근거로 들었다. 실제로 어도비는 2024년 3월 엔비디아와의 협력 확대 발표에서 Adobe PDF Extract 서비스를 활용해 네모트론을 포함한 차세대 엔비디아 AI 기반 모델을 학습·튜닝하기 위한 데이터셋을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사는 PDF를 대규모언어모델(LLM) 학습에 활용하기 위한 공동 데이터셋 연구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코를리 판사도 이런 협력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안나스 아카이브 이용 사실까지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결정문에 따르면 원고 측은 어도비가 PDF Extract를 이용해 네모트론 모델의 학습과 미세조정(fine-tuning)에 참여했고, 대규모 영어책 데이터를 구하려면 안나스 아카이브 같은 불법 출처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런 주장이 엔비디아가 실제 안나스 아카이브를 이용했다는 개연성 있는 추론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실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저작권 침해뿐 아니라 ‘Article III 손해’도 부족
이 판단은 저작권법상의 침해 요건뿐 아니라 미국 헌법 제3조(Article III)에 따른 원고적격(standing) 문제와도 연결됐다.
미 연방법원에서 원고적격을 인정받으려면 원고는 무엇보다 실제 발생했거나 임박한 ‘사실상의 손해(injury in fact)’를 입증해야 한다. 단순히 추측에 그친 주장이나 가상의 피해 주장으로는 부족하다.
코를리 판사는 “탠저가 네모트론과 관련해 직접 저작권 침해와 사실상의 손해를 충분히 주장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저작권 침해 청구를 위해서는 원고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뿐 아니라 피고 자신이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사실도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네모트론이 탠저의 책을 포함한 안나스 아카이브 자료로 학습됐다는 연결고리부터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 판단으로 충분하다며, 설령 네모트론이 문제의 자료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료를 실제 취득한 주체가 어도비인지 엔비디아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어도비의 두 번째 주장까지 판단하지 않았다. 엔비디아는 이 소송의 피고도 아니다.
이는 법원이 AI 학습에 저작권이 있는 책을 이용하는 행위 자체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공정 이용(fair use)’ 여부를 본격적으로 판단한 결정도 아니다. 소송 초기 단계에서 원고가 특정 저작물과 특정 학습 데이터, 피고의 행위를 연결하는 사실을 충분히 주장했느냐가 쟁점이었다.
어도비 AI 저작권 소송은 계속된다
어도비를 상대로 한 AI 학습 데이터 저작권 분쟁은 탠저 사건 이전부터 진행돼 왔다.
2025년 12월 작가 엘리자베스 라이언(Elizabeth Lyon)은 어도비가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책을 이용해 SlimLM을 훈련했다며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로이터는 라이언이 어도비의 SlimLM 학습에 해적판 책이 포함된 Books3 데이터셋이 이용됐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어도비를 직접 겨냥한 첫 AI 저작권 소송으로 알려졌다.
탠저 사건에서도 SlimLM은 별도의 축이다. 소장에 따르면 SlimLM은 SlimPajama 데이터셋으로 훈련됐고, 이 데이터에는 약 19만6640권의 책으로 구성된 Books3가 포함됐다는 것이 원고 측 주장이다. 탠저는 자신의 저작물도 Books3에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8월20일 결정의 범위를 ‘어도비가 AI 학습 저작권 소송에서 승소했다’고 확대해석하기는 어렵다. 코를리 판사는 어도비의 신청 자체가 네모트론에서 비롯된 청구 부분을 대상으로 한다고 명시했고, 서로 다른 회사가 공개하고 서로 다른 데이터셋으로 학습한 두 AI 모델에 관한 주장은 별도의 청구로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탠저에게도 다시 소송할 길이 남아 있다. 법원은 네모트론 관련 청구를 수정할 기회를 주는 ‘수정 허용 기각(dismissal with leave to amend)’ 결정을 내렸다. 수정소장 제출 기한은 10월2일이다.
결국 탠저 측이 소송을 계속하려면 네모트론의 방대한 학습 규모나 AI 업계에서 불법 전자책 데이터가 사용돼 왔다는 일반적인 주장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탠저의 책이 포함된 데이터가 실제 네모트론 학습에 들어갔다는 연결고리가 중요해졌다.
이 결정은 AI 학습 자체의 저작권 적법성에 관한 최종적인 법적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보긴 어렵다. AI 학습 데이터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원고가 소송 초기 단계에서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데이터 출처와 침해 행위를 제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Q&A
Q1. 법원이 탄저의 어도비 소송 전체를 기각했나?
아니다. 8월20일 결정은 네모트론에서 비롯된 직접 저작권 침해 청구 부분을 대상으로 한다. SlimLM 관련 주장은 이 결정으로 기각되지 않았다.
Q2. 법원이 어도비가 안나스 아카이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인정한 것인가?
아니다. 법원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정한 것이 아니라, 원고가 ‘사용했다’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만큼 구체적인 사실을 소장에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Q3. 왜 ‘information and belief’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나?
정보와 신념에 근거한 주장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 사건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실 없이 결론만 제시했다고 봤다. 미국 연방 민사소송에서는 단순히 가능한 주장보다 개연성 있는 청구가 요구된다.
Q4. 법원이 AI 학습은 공정 이용이라고 판단했나?
아니다. 이 결정은 네모트론 학습이 저작권법상 공정 이용인지 판단한 것이 아니다. 원고가 자신의 책과 안나스 아카이브, 네모트론 학습 사이의 사실관계를 충분히 주장했는지가 핵심이었다.
Q5. 사건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
탄저는 10월2일까지 수정소장을 제출할 수 있다. 네모트론이 자신의 저작물을 포함한 데이터로 실제 학습됐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추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