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미국 메모리 기술업체 넷리스트(Netlist)가 자국의 대표적인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의 인공지능(AI)용 고대역폭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HBM)를 겨냥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특허침해 사건을 새로 제기했다.
두 회사 모두 미국 기업이지만 마이크론은 대만·일본·싱가포르 등 해외에서도 D램과 HBM을 생산·패키징한다. 넷리스트는 일반 법원의 손해배상 소송과 별도로 미국으로 들어오는 특허침해 제품의 반입을 ITC를 통해 막겠다는 전략이다.
마이크론은 올해 6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분기보고서에서 “대만의 D램·HBM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D램과 AI 메모리 생산시설을 현대화하고 싱가포르에는 HBM 첨단 패키징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고 밝혔다.
넷리스트는 “마이크론의 HBM뿐 아니라 이를 탑재한 엔비디아(NVIDIA), 구글(Google), 브로드컴(Broadcom)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서버 등도 수입금지 대상에 포함해 달라“고 청구했다. 특허분쟁의 대상이 메모리 칩에서 이를 사용하는 AI 컴퓨팅 장비까지 확대된 것이다.
로이터는 9월 29일 “넷리스트가 마이크론의 메모리 칩과 이를 사용하는 구글·엔비디아·브로드컴의 AI 컴퓨팅 제품에 대한 미국 수입금지를 요구하는 새 ITC 제소를 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은 로이터에 이번 제소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고 구글·엔비디아·브로드컴은 즉각 답변하지 않았다.
HBM은 여러 개의 D램(DRAM)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와 대역폭을 높인 고성능 메모리다. 대규모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AI 가속기의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넷리스트는 서버용 메모리와 HBM 관련 기술을 개발해 특허 라이선스와 제품 판매 사업을 하는 미국 업체다. 회사가 9월 29일 공개한 ITC 제소 발표를 보면 미국 특허 제12308087호와 제12646537호 등 2건을 근거로 “마이크론의 HBM3E·HBM4·HBM4E가 자사 기술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넷리스트는 마이크론의 HBM을 공급받아 GPU·서버 등 완제품에 사용하는 고객사(downstream customers)인 엔비디아·브로드컴·구글도 마이크론과 함께 피신청인으로 지목했다.
손해배상보다 강한 카드 ‘미국 반입 차단’
넷리스트가 요구한 구제조치는 손해배상이 아니라 배제명령(exclusion order)과 중지명령(cease and desist order)이다. 미국 관세법 337조(Section 337 of the Tariff Act of 1930, 19 U.S.C. §1337)에 따라 ITC가 특허를 침해한 수입품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무역 구제조치다.
ITC 사건을 일반 특허소송과 구별하는 핵심도 여기에 있다. 연방법원 특허소송이 손해배상과 금지명령 등을 다룬다면 ITC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제품을 대상으로 특허침해 여부를 조사해 배제명령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당사자가 모두 미국 회사라고 하더라도 문제의 반도체가 해외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들어오면 ITC 절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마이크론의 해외 생산 비중은 상당하다. 마이크론은 2025 회계연도 연차보고서에서 대만에서 웨이퍼 제조와 조립·검사를, 싱가포르에서 웨이퍼 제조와 조립·검사를, 일본에서 웨이퍼 제조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회사는 2026년 대만에서 D램과 HBM 생산능력 확대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는 반입 차단의 범위가 마이크론 메모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쟁점이다. 로이터는 9월 29일 “넷리스트가 마이크론의 D램 장치와 해당 기술을 사용하는 구글·엔비디아·브로드컴의 GPU·서버 및 기타 제품의 수입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따라서 엔비디아·구글·브로드컴이 마이크론과 직접 특허를 놓고 다투기 때문에 피신청인이 된 것은 아니다. 넷리스트가 특허침해라고 주장하는 마이크론 메모리가 이들 회사의 AI 컴퓨팅 제품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함께 수입금지 대상으로 지목된 구조다.
한 달 사이 마이크론 상대 ITC 사건 두 건
이번 제소는 넷리스트가 마이크론을 상대로 8월 제기한 다른 ITC 사건과 별개다.
넷리스트는 8월 11일 마이크론과 서버업체 슈퍼마이크로컴퓨터(Super Micro Computer), 휴렛팩커드 엔터프라이즈(Hewlett Packard Enterprise·HPE), 레노버(Lenovo)를 상대로 DDR5 RDIMM·MRDIMM 관련 특허 4건을 침해했다며 ITC에 제소했다. 넷리스트는 당시 발표에서 마이크론이 문제의 메모리 제품을 해외에서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ITC는 9월 23일 이 사건에 대해 정식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사건번호는 ‘특정 동적 임의접근 메모리 장치 및 이를 포함한 제품과 구성요소 사건(Certain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DRAM) Devices, Products Containing the Same, and Components Thereof (III), Investigation No. 337-TA-1523)’이다. ITC는 조사 개시 결정 자체가 사건의 본안 판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8월 사건이 서버용 DDR5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다면 9월 29일 새 제소는 AI 가속기에 사용되는 HBM을 직접 겨냥한다. 넷리스트는 새 사건에서 HBM3E뿐 아니라 차세대 HBM4와 HBM4E까지 특허침해 제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이크론과 2022년부터 특허전
넷리스트와 마이크론의 분쟁은 이번 ITC 제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로이터는 2024년 5월 “텍사스 동부연방법원 배심원단이 마이크론의 고성능 컴퓨팅용 메모리 모듈이 넷리스트 특허 2건을 고의로 침해했다고 평결하고 4억450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넷리스트 대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사건(Netlist, Inc. v. Micron Technology Texas, LLC, No. 2:22-cv-00294)’으로 2022년 제기됐다. 당시 배심원 평결에서 문제가 된 제품은 마이크론의 DDR4 RDIMM과 DDR4 LRDIMM이었다. 넷리스트는 2024년 5월 24일 발표에서 배심원단이 두 특허의 침해와 고의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삼성과는 8월 합의…마이크론과는 ITC 분쟁 확대
넷리스트는 삼성전자와도 장기간 메모리 특허전을 벌였지만 지난 8월 합의했다.
로이터는 8월 5일 “넷리스트와 삼성전자가 5년간의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수년간 이어진 특허분쟁을 끝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은 넷리스트의 서버용 듀얼 인라인 메모리 모듈(DIMM)과 HBM 관련 특허를 포함한 포트폴리오에 접근하고 넷리스트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를 공급하기로 했다.
넷리스트의 SEC 공시를 보면 삼성은 5년간 넷리스트 특허를 라이선스하고, 넷리스트는 삼성으로부터 연간 최대 3억달러 규모의 D램·낸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계약했다. 양사는 진행 중인 법적 분쟁도 합의로 종결하기로 했다.
반면 마이크론과는 8월 DDR5 사건에 이어 9월 HBM 사건까지 ITC 분쟁이 확대됐다. 특히 이번에는 AI 반도체와 클라우드 인프라에 관여하는 엔비디아·브로드컴·구글이 피신청인으로 포함됐다.
넷리스트 최고경영자(CEO) C.K. 홍(C.K. Hong)은 9월 29일 회사 발표에서 “넷리스트는 현재 빠르게 확대되는 AI 인프라에 사용되는 첨단 메모리 기술을 수십 년 동안 개발해 왔다”며 “이번 조치는 우리의 기반 기술을 무단 사용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지속적인 의지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Q&A
Q1. 미국 회사끼리 분쟁인데 왜 ‘수입금지’를 요구할 수 있나?
기업의 국적보다 제품이 미국으로 수입되는지가 중요하다. 마이크론은 미국 기업이지만 대만·일본·싱가포르 등에 반도체 생산·패키징 시설을 운영한다.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미국 특허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관세법 337조에 따른 ITC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Q2. 왜 엔비디아·구글·브로드컴까지 사건에 포함됐나?
넷리스트는 이들을 **마이크론의 HBM을 공급받아 GPU·서버 등 완제품에 사용하는 고객사(downstream customers)**로 지목했다. 넷리스트는 마이크론 메모리 자체뿐 아니라 이를 탑재한 완제품의 수입까지 제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이는 넷리스트의 주장과 요청이며 ITC는 아직 특허침해 여부나 배제명령 범위를 판단하지 않았다.
Q3. HBM은 왜 AI 반도체에서 중요한가?
HBM은 여러 D램을 수직으로 쌓아 프로세서와 메모리 사이에서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하도록 만든 고성능 메모리다. AI 모델 학습·추론에서는 GPU 등 가속기가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기 때문에 HBM이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이번 사건에서 넷리스트는 현재 제품인 HBM3E뿐 아니라 차세대 HBM4·HBM4E까지 자사 특허의 적용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