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중견 로펌의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값비싼 AI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많이 사들이느냐보다 이를 기존 법률 업무에 제대로 연결할 수 있느냐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형 로펌처럼 별도의 AI 조직을 만들기 어려운 중소 로펌에서는 법률과 기술을 함께 이해하고 여러 시스템을 실제 업무 흐름으로 묶는 ‘AI 통합자’가 새로운 핵심 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소·중견 로펌에는 별도의 AI 부서보다 구입한 소프트웨어를 실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연결할 독립적인 전략 AI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미국의 세계 최대 법률 정보 플랫폼 로닷컴(Law.com)이 8월21일 전했다. 이는 AI 전략 전문가이자 ‘버스터 디지털 미디어(Buster Digital Media)‘ 창립자인 버스터 콕스(Buster Cox)의 ‘Expert Opinion(전문가 기고)’이다.
콕스는 글에서 “AI가 강력한 법률 기술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지만 이를 실제 로펌 업무에 구현하는 과정까지 단순하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AI를 쓰는 로펌은 고객의 비밀정보를 보호하고, 외부 기술업체를 감독하며, 중요한 AI 결과를 검증하는 동시에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중소 로펌의 AI 도입이 ‘어떤 AI를 살 것인가’에서 ‘누가 AI를 업무에 연결하고 관리할 것인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MS도 ‘리걸 엔지니어’ 채용…법률과 AI 연결하는 새 직종
이런 역할은 이미 대형 기술기업과 법률 AI 업계에서 구체적인 직종으로 등장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법률조직의 AI 전환을 담당할 ‘프린시펄 리걸 엔지니어(Principal Legal Engineer)’를 채용하면서 이 인력이 단순한 기술 자문자가 아니라 AI를 실제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8월14일 공개된 마이크로소프트 채용 공고에 따르면 리걸 엔지니어는 회사의 법무조직인 CELA(Corporate, External and Legal Affairs)에서 엔지니어들과 직접 협업하고 변호사·패럴리걸 가까이에서 AI 시스템을 설계하는 업무를 맡는다. 회사는 같은 조직에 AI 운영 전략과 기술 플랫폼을 총괄하는 ‘Director, AI Operations’도 모집하고 있다.
리걸 엔지니어(legal engineer·법률지식과 기술을 결합해 법률 업무용 시스템과 AI 업무 흐름을 설계하는 전문가)는 법률 AI 기업에서도 빠르게 늘고 있다.
앞서 로이터는 7월30일 “법률 AI 업체들은 변호사를 리걸 엔지니어로 채용해 AI 제품 개발과 고객 지원, AI 훈련 등을 맡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비(Harvey)와 레고라(Legora) 같은 법률 AI 기업들이 이런 인력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으며, 고도의 프로그래밍 능력보다는 법률 실무를 이해하면서 기술에 관심을 가진 인재도 이 직무로 이동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이는 Law.com 기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 시장 변화다. 대형 조직에서는 리걸 엔지니어를 내부 직원으로 둘 수 있지만, 규모가 작은 로펌이라면 같은 기능을 담당할 독립 전문가나 외부 컨설턴트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중견 로펌 95%가 AI 사용…하지만 46%는 안전장치 불신
문제는 AI 도입 속도에 비해 이를 관리하는 체계가 뒤따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법률사무소 운영 소프트웨어 업체 액션스텝(Actionstep)이 미국 중견 로펌을 조사한 결과 95%가 이미 AI를 사용하고 있지만, 응답자의 46%는 현재 마련된 AI 안전장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로펌의 83%는 하나의 사건을 처리할 때 세 가지 이상의 기술 도구를 사용한다고 2026 미국 중견 로펌 우선순위 보고서에서 밝혔다.
여러 AI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개별 제품의 성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고객관리, 문서관리, 법률 리서치, 계약 검토, 청구 시스템 등에 각각 다른 AI가 들어가면 데이터가 어느 시스템으로 이동하는지, 어떤 직원에게 접근권한을 줄 것인지, 최종 결과를 누가 검증할 것인지까지 설계해야 한다.
액션스텝 조사에서 드러난 ‘기술 스택(tech stack·조직이 업무에 사용하는 여러 소프트웨어와 기술의 조합)의 파편화’는 바로 이런 문제다. AI 도입이 늘어날수록 통합과 거버넌스(governance·AI의 사용 권한과 책임, 위험관리 기준을 정하고 감독하는 체계)의 중요성도 함께 커지는 구조다.
클리오(Clio)의 조사에서도 AI는 이미 중견 로펌의 일상 업무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2026 중견 로펌 법률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중견 로펌의 86%가 AI를 사용하고 있으며 60%는 AI 이용에 관한 공식 정책을 마련했다. AI를 이용해 인력을 늘리지 않고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도 65%였다.
두 조사의 조사 대상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86%와 95%라는 AI 이용률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견 로펌에서도 AI가 실험용 기술을 넘어 실제 업무 도구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는 방향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AI에 맡겼다”로 변호사의 책임 사라지지 않아
법률업계에서 시스템 통합이 일반 기업보다 까다로운 이유는 변호사의 직업윤리 의무 때문이다.
미국변호사협회(ABA)는 생성형 AI를 이용하더라도 변호사가 전문적 능력, 고객정보 비밀유지, 고객과의 의사소통, 직원과 외부 업무수행자에 대한 감독, 법원에 대한 진실성, 합리적인 수임료 등의 의무를 계속 부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ABA는 최근에도 AI가 법률 리서치와 문서작성, 디스커버리(discovery·미국 소송에서 상대방에게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확보하는 절차), 소송전략과 거래 업무에 깊숙이 들어왔지만 AI 사용에 따른 전문직 책임에는 예외가 없다는 점을 7월 공개한 법률 AI 윤리 자료에서 강조했다.
그 토대가 된 ABA의 ‘Formal Opinion 512’는 변호사가 생성형 AI의 능력과 한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AI가 만든 결과의 정확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고객 관련 정보를 AI에 입력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밀유지 위험도 평가해야 한다.
결국 중소 로펌에 필요한 AI 전문가는 단순히 챗봇 사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어떤 업무를 AI에 맡길지 결정하고, 적합한 제품을 선택하고, 서로 다른 시스템을 연결하며, 데이터와 접근권한을 관리하고, 사람이 최종 검증하는 절차까지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대형 로펌과 중견 로펌의 AI 투자 격차도 변수
중견 로펌에는 비용 문제도 있다. 대형 로펌과 같은 규모의 기술조직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톰슨로이터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미국 중견 로펌의 기술·지식관리 관련 투자 증가율은 6.2%로 로펌 시장의 다른 부문보다 낮았다. 중견 로펌의 시간당 업무요율 증가율도 5.3%로 Am Law 100 대형 로펌의 9.8%에 크게 못 미쳤다. 톰슨로이터는 이런 격차가 대형 로펌이 높아진 수익을 다시 인프라에 투자하는 동안 중견 로펌에는 기술투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5월26일 분석에서 지적했다.
이 때문에 중소 로펌에서는 대규모 AI 부서를 신설하는 것보다 법률 업무와 기술을 동시에 이해하는 소수 인력에게 AI 도입 전략과 시스템 통합을 맡기는 방식이 비용 면에서도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중소 로펌에 반드시 별도의 ‘AI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펌의 규모와 업무 분야, 고객정보의 민감도, 이미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등에 따라 필요한 기술 관리 수준은 달라질 수 있다. Law.com에 실린 주장 역시 전문가 의견이라는 점에서 이런 조건을 고려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최근의 흐름은 분명하다. 법률 AI 경쟁의 중심이 AI 제품을 ‘보유하는 것’에서 이를 법률 업무에 안전하게 ‘구현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리걸 엔지니어라는 새 직종의 확산은 그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Q&A
Q1. Law.com 기고문의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중소·중견 로펌이 대형 로펌처럼 별도의 AI 부서를 만들기보다는 여러 AI와 기존 소프트웨어를 실제 법률 업무에 연결할 수 있는 전략 전문가를 활용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Q2. 리걸 엔지니어는 무엇을 하는가.
법률 업무와 기술을 함께 이해하면서 AI 도구, 데이터와 기존 소프트웨어를 연결해 실제 업무 흐름을 설계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법률 AI 업체들도 이런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Q3. AI 제품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시스템을 함께 사용하면 고객정보 보호, 데이터 이동, 접근권한, AI 결과 검증, 외부 업체 감독 등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Q4. 변호사가 AI 결과를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ABA 윤리 지침은 변호사가 AI의 능력과 한계를 이해하고 결과의 정확성을 검토하며 고객정보를 보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AI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변호사의 전문직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다.
Q5. 중소 로펌에 AI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나.
가능하다. AI를 제대로 업무에 연결하면 적은 인원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을 늘릴 수 있다. 다만 기술 도입과 함께 보안·검증·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