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쓰면 더 많이 일하라고?”…미 대형 로펌 마케팅팀에 번지는 ‘생산성 역설’

Western lawyers working late in glass offices

미국 대형 로펌들이 인공지능(AI)을 업무에 빠르게 도입하면서 마케팅·사업개발(BD) 부서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AI로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게 됐다는 이유로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지 명확한 목표를 정하거나 그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법률전문플랫폼 로닷컴(Law.com)은 8월28일 자체 ‘2026 법률 마케팅 설문조사’를 토대로 대형 로펌의 경영진과 마케팅·사업개발 부서 사이에서 이런 긴장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출과 수익성 목표는 높아지고 있지만 이에 맞춰 자원이 늘어나지는 않으면서 일부 마케팅 담당자들이 번아웃에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대형 로펌 마케팅 임원은 이를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라고 표현했다. AI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해주지만, 절약한 시간이 업무 감소로 이어지는 대신 새로운 업무와 더 높은 성과 목표로 채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목표는 불분명한데 성과 요구는 커져

로펌의 마케팅·사업개발 부서는 단순히 광고나 홍보를 담당하는 조직이 아니다. 대형 로펌에서는 주요 기업 고객 관리부터 신규 고객 발굴, 변호사 영업 지원, 입찰제안서(RFP) 작성, 시장·경쟁사 분석, 브랜드 관리와 콘텐츠 제작까지 맡는다.

Law.com의 조사에서 드러난 문제도 업무 자체보다 이를 운영하는 방식에 가깝다. 로펌 경영진이 마케팅 조직에 높은 기대를 걸면서도 목표와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거나 충분한 자원을 배정하지 않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이 마케팅 부서의 요청에 제때 대응하지 않는 문제도 주요 장애물로 지적됐다.

AI는 이 간극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생성형 AI를 이용하면 고객 자료 조사나 콘텐츠 초안, 제안서 작성, 데이터 분석 등의 일부 업무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AI가 절감한 시간을 곧바로 추가 업무 처리 능력으로 간주하면 마케팅 인력의 업무량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AI를 실제 마케팅에 활용할 가능성 자체는 빠르게 커지고 있다. 미국변호사협회(ABA)는 올해 1·2월호 법률실무 매거진에서 생성형 AI가 변호사의 콘텐츠 제작뿐 아니라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형식으로 재가공하고 성과를 분석하는 데까지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ABA는 변호사가 AI가 만든 내용의 정확성과 고객 비밀유지, 직업윤리 준수에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AI를 이용해 콘텐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것과 사람의 검토 없이 콘텐츠를 대량 생산해도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의미다.

승인받지 않은 ‘섀도 AI’도 확산

더 큰 문제는 조직의 AI 전략과 실제 직원들의 사용 방식 사이의 간극이다.

법률·회계 등 전문서비스 산업을 조사한 톰슨로이터의 ‘2026 전문직의 미래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전문직 종사자의 74%가 이미 일주일에 여러 차례 AI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41%는 검증된 전문 콘텐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업무용 AI 도구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 결과 회사가 허용하지 않은 AI를 업무에 사용하는 이른바 ‘섀도 AI(shadow AI)’가 생겨나고 있다. 조사 대상의 34%는 조직이 승인하지 않은 AI 도구를 업무에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 조사는 지난 3~4월 법률·세무·회계·감사·컴플라이언스 등 전문직 종사자 1816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로펌만 따로 보면 AI를 둘러싼 압력은 더욱 분명하다. 톰슨로이터가 별도로 정리한 2026년 법률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로펌 종사자의 24%는 전문 업무용 AI 도구를 사용할 수 없는 직장의 취업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답했다. 조사 대상 로펌 종사자의 34%는 회사가 승인하지 않은 AI를 업무에 사용하고 있었다.

AI를 단순히 비용 절감 수단으로 보는 경영진에게는 역설적인 결과다. 공식적인 AI 도구와 교육에 투자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공개형 AI 서비스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면서 고객 정보와 비밀정보가 통제되지 않는 시스템에 입력될 가능성이 생긴다. 비용을 아끼려다 보안·비밀유지·법적 책임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도 로펌의 AI 활용을 요구하기 시작

AI를 둘러싼 압력은 로펌 내부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톰슨로이터의 법률산업 조사에서 기업 법무 담당자의 77%는 거래하는 로펌으로부터 AI를 활용한 업무 품질 개선을 제공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나 필수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대부분 또는 모든 외부 로펌이 실제로 이를 제공한다고 답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

비용 청구 방식에도 변화 압력이 생기고 있다. 기업 법무 담당자의 71%는 AI 사용이 늘어나면 로펌이 서비스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고 예상했다. 반면 로펌 종사자의 62%는 AI 도입에도 자사 가격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고 답했다.

AI가 변호사뿐 아니라 마케팅과 사업개발 조직의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도록 만들면서 대형 로펌은 결국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AI로 어느 정도 생산성을 높일 것인지 정하는 것과 그 생산성 향상으로 만들어진 시간과 비용을 누구에게 돌려줄 것인지다.

AI가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을 늘렸다는 이유만으로 목표를 계속 높이면 기술이 직원의 업무 부담을 줄이는 도구가 아니라 업무량을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반대로 AI 사용을 막거나 제대로 된 업무용 도구를 제공하지 않으면 섀도 AI와 정보보호 문제가 커질 수 있다.

Law.com이 지적한 대형 로펌 마케팅 조직의 ‘생산성 역설’은 결국 AI 도입 자체보다 조직 운영의 문제다. AI가 얼마나 많은 일을 대신할 수 있느냐 못지않게, AI로 확보한 생산성을 로펌이 어떻게 측정하고 배분할 것인지가 새로운 경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Q&A

Q1. 대형 로펌의 마케팅 부서는 일반 기업 마케팅 부서와 무엇이 다른가.

대형 로펌에서는 광고뿐 아니라 기업 고객 관리, 신규 사건과 거래 수임을 위한 사업개발, 제안서 작성, 변호사의 영업 활동 지원, 시장·경쟁사 조사 등을 담당한다. 로펌 매출과 직접 연결되는 기능이 상당하다.

Q2. AI를 도입하면 마케팅 직원의 일이 줄어드는 것 아닌가.

개별 업무에 필요한 시간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경영진이 절감된 시간만큼 업무 목표를 높이면 전체 업무 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Law.com 보도에서 말하는 ‘생산성 역설’이 이 문제다.

Q3. 로펌 마케팅에서 AI는 어디에 사용할 수 있나.

고객·시장 조사, 콘텐츠 초안 작성, 기존 콘텐츠 재가공, 제안서와 프레젠테이션 작성 지원, 데이터 분석 등에 활용할 수 있다. 다만 변호사 광고와 고객 정보에는 윤리·비밀유지 문제가 있어 사람의 감독이 필요하다.

Q4. ‘섀도 AI’는 무엇인가.

회사가 공식적으로 승인하거나 관리하지 않는 AI 서비스를 직원이 업무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객이나 사건 관련 정보를 이런 서비스에 입력하면 기밀정보 유출과 개인정보보호, 변호사의 비밀유지 의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Q5. 로펌이 AI를 도입하지 않는 것도 위험한가.

그렇다. 톰슨로이터 조사에서는 기업 고객들이 외부 로펌에도 AI를 활용한 효율성과 품질 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AI 도입뿐 아니라 지나치게 느린 도입도 고객과 인재 확보 측면에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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